[경력관리] 취미 따로 일 따로?
2002년 01월 03일
글 허시명/ 투잡스 전문기자 (twojobs@korea.com)
낮에는 회사원, 밤에는 스키 강사…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도 버는 스포츠 마니아들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는 ‘즐길 수 있는 노동에 종사한다면 그 인생은 최고’라고 했다. 물론 그런 행운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 중에는 취미와 직업을 일체화하려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인생을 즐기려는 수단으로 직업을 찾는다. 돈과 명성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서 ‘즐기며 돈 버는 일’이란 흔하지 않다. 그래서 이들은 투잡스족이 돼야 하는 경우가 많다.
최성진(29·가명)씨는 한 중소기업의 구매과 직원이다. 그러나 밤에는 스키 강사로 변신한다. 그는 집 근처에 스키장이 있어 어려서부터 스키를 탔는데, 동네 형들의 권유로 스키 강사를 시작했다. 그들이 스키장 주변의 스키숍이나 스키 대여점과 맺고 있던 연줄 덕분에 출발은 비교적 쉬웠다. 강원도에서는 감자 캐던 농부도 스키 시즌에는 스키 강사로 변신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야간과 휴일 이용 스키 강사로 나서
처음에는 스키 강사만 하고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름을 넘기면서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느라 번 돈을 다 까먹게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집안 어른들이 스키 강사를 그만두라고 했다. 성화에 못 이겨 그는 회사에 취직했다. 그게 현명한 판단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겨울을 몇번 나고서야 깨닫게 됐다. 그는 규칙적인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서 비로소 집에서 독립할 수 있었고, 돈도 모을 수 있었다.
그는 안정된 강사직을 수행하기 위해, 대한스키지도자협회에서 발급하는 스키 강사 자격증도 따두었다. 그가 투잡스를 잘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고객관리, 스키숍이나 대여점 관리다. 그는 스키를 가르칠 때 평지에서 시간을 끌지 않고 곧바로 리프트를 타고 슬로프로 올라간다. 그곳에서 수강생을 앞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내려온다. 두서너 번 그렇게 내려오면 초보자도 금세 균형감각을 배우게 된다. 한번 교육받은 고객에게 지속적인 자문을 해주고, 스키숍이나 대여점에 고객을 소개해준다.
스키 강사 부업은 고액의 수입이 가능하다. 1 대 1 강습료는 4시간에 30만원 안팎 정도다. 그는 평일 밤엔 20만원, 휴일에는 100만원도 번다. 겨울 한 시즌을 지나고 나면, 웬만한 월급쟁이 연봉이 부럽지 않다.
지금 그는 야간과 휴일을 이용해 스키 강사 일을 계속 하고 있다. 그러자니 회사의 야근과 휴일 근무는 못 한다. 휴가도 겨울로 몰아서 쓴다. 이런 그를 회사에는 이상하게 바라보지만, 그는 남의 눈치를 살필 겨를이 없다. 그는 당분간 투잡스를 유지하고, 종잣돈을 모으면 스키 숍을 내려고 한다.
임성준(31)씨는 스노보드 강사를 하는 투잡스족이다. 그는 현재 용평스노보드학교의 주임강사다. 스키장은 통상 11월 중순에 개장하고 4월 중순에 폐장한다. 5개월 가량 일할 수 있다. 계약직으로 일하기 때문에 날이 풀리면 다른 직장을 찾아야 한다. 임성준씨는 지금까지 50가지 정도 직업을 거쳐왔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빼놓은 ‘택시 운전’말고 그가 안 해본 일이란 없다. 웨이터, 대리운전, 장의사, 스키숍 매니저, 하여튼 구인 광고란에 오른 직업은 거의 거쳐보았다. 주변 사람들이 한심하게 바라보고, 집안 어른들이 역정을 내리라는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일이다. 하지만 젊고 미혼인 그는 패기만만하다.
그는 '내 식대로 살면서 밥벌이를 하겠다'는 확고한 직업관을 갖고 있다. 내 의지대로 나를 부리겠다는 뜻이다.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스노보드 정신과 맞닿아 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는 것도 그런 자유정신에서 가능하다. 하지만 그가 지금 단순히 스노보드 강사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명함에는 ‘드림라이더’(Dreamrider)라는 회사 이름이 적혀 있다. 꿈의 라이더라는 뜻인데, 스케이트보드나 스노보드를 포함한 토털 액션스포츠 전문점의 명칭이다. 사업자 등록증도 내놓았고, 전국 체인점을 낼 준비도 해두었다. 그는 외국의 스포츠 산업을 벤치마킹하면서 사업을 구상중이다.
스포츠 산업, 마니아들이 이끈다
얼마 전 필자는 포천에 있는 운악승마장엘 갔다. 말을 타고 산을 넘기로 한 날이었다. 휴가를 내지 않고서는 직장인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평일이었다. 일행은 교관을 포함해서 40대 여성이 셋, 정년퇴직자인 듯한 60대 사내가 둘, 그리고 40대 부부 한쌍이었다. 그들은 거의 매일 말을 타러 온다고 했다. 여자들이야 남편 덕에 할 수 있는 일일 테지만, 40대 부부는 무슨 팔자가 좋아서 저럴 수 있는지 궁금했다.
40대 부부에게 다가가 이말 저말을 건네보았다. 사내는 풍을 맞아서 말을 타기 시작했고, 이제는 감각을 되찾을 정도가 되었다고 했다. 궁금한 것은 그의 돈벌이였다. 그는 농장도 하고 음식점도 하고, 안 해본 일이 없다. 지금은 임대업과 주식투자를 하고 있었다. 그의 투자 실력은, 방송에 출연하는 증권전문가가 다음주의 투자동향을 물어올 정도로 실전에 강하기로 정평이 난 정도란다.
그런데 이 40대 부부가 승마 안전모를 쓰지 않고 대신 멋진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온 것을 교관이 나무라자, 곁에 있던 60대 초반 박승운씨가 나섰다. '흔히 쓰는 값싼 승마모는 겉이 딱딱해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바닥에 떨어지면 모자가 깨집니다.'
알고 보니, 박승운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산을 타기 시작했고, 암벽과 빙벽등반, 그리고 산악오토바이까지 두루 섭렵한 스포츠 마니아였다. 코오롱에서 운영하는 등산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실력가이기도 하다. 그는 한때 등산복과 스키복을 만드는 일을 했고, 지금은 모터사이클의 헬멧을 만들고 있었다. 그의 아들 또한 모터사이클 마니아들이 알아주는 전문 사이트 www.motorfashion.net를 운영하고 있었다.
한국은 세계 헬멧 시장에서 독일, 일본과 경합하면서 저가형 헬멧 공급을 주도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가 경쟁력이 있는 좋은 시장에서, 더구나 자신이 마니아이기도 한 모터사이클 분야에서 사업을 벌여 노후의 안전한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이상적인 경우다. 취미로만 유지해도 다행일 텐데 취미로 삼은 분야가 직업이 되다니. 일에 쫓겨 취미생활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보통의 직장인들에 견주면 하늘나라 이야기다.
스포츠 산업은 다른 산업과 다른 특수성이 있다. 신제품은 주로 전문선수들의 제안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홍보 역시 전문선수들이 입고, 신고, 타고 다니면 비교적 쉽게 붐을 탄다. 마이클 조던이 신기 편한 농구화를 제안하고, 그것을 신고 다닌다고 생각해보라. 그래서 기획과 생산, 유통과 홍보 분야에 전문선수들이 참여한다. 헬멧을 만드는 박승운씨도 그런 점들을 잘 안다.
취미 시장의 팽창은 미래형 트렌드
수영전문 사이트 www.finflier.com를 운영하고 있는 김재중씨는 좀 다른 경우다. 그는 회사를 다니면서 취미 삼아 운영했던 사이트가 부업이 되고, 부업이 본업이 된 경우다. 그는 군대에서 헌병 근무를 하다가 무릎 통증이 악화돼 재활치료 차원에서 수영을 시작했다. 그런데 의외로 수영이 재미있었다. 가만히 주변을 살펴보니 수영을 10년 한 사람도 수영을 마스터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수영에도 목표 하나를 달성하면, 새로운 목표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을 수영의 중독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튼 그도 수영에 ‘중독’되었다. 그는 당시에 에버랜드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회사에서 1인 1홈페이지 갖기 운동을 벌였다. 그는 물놀이 시설을 갖춘 회사의 특성을 살려서, 수영 사이트를 만들었다. 반응이 좋았다. 그는 부서를 대표할 정도가 되었다. 사이트 접속자 수도 다달이 2배씩 늘었다. 그는 사이트 방문자의 질문에 답하느라 밤을 샐 지경이 되었다. 새로운 사업을 벌여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회사에 사업 제안서를 냈다. 그러나 웬걸,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는 낙담했다. 하지만 오기가 생겼다. 성공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사표를 내고 1999년 10월에 사업자등록을 냈다.
그가 겨냥한 것은 전국의 1500개의 수영장과, 이들 수영장에 회원으로 등록한 200만명의 수영인이었다. 수영장은 계속 늘어나는데, 관련 정보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가 운영하는 사이트로 몰려드는 회원 수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하루에 5천명 정도가 방문했다. 올해는 2배로 늘리는 것이 목표다. 그는 큰 욕심없이, 자기가 하고픈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으면 만족이라고 했다. 동시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충고 한마디도 잊지 않았다. '일년 내내 라면만 끓어먹을 용기도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 수영사이트를 관리하면서 휜플라이어 상표의 수영용품을 판매하고 있다.
1인 기업 ‘21세기 문화그룹 TCP’를 운영하는 김현우씨는 취미 산업 분야를 이렇게 진단한다. '취미생활도 미친 듯이 하다 보면 예상치 않았던 좋은 일들이 내 몫이 될 수도 있다. 취미 시장의 엄청난 확장은 이미 확실시되고 있는 미래형 트렌드다. 이것이 바로 21세기 직업 대혁명이다.'
스포츠 마니아들 중에서 투잡스족이 된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부업이 본업이 되기를 갈망한다. 모터사이클이나 스키를 타면서 새로운 사업아이템을 개발하고, 수영을 하면서 새로운 상품을 기획한다. 취미가 직업이 되고, 직업이 취미가 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면, 평일과 휴일의 개념마저 없어질 것이다. 스포츠 마니아들은 그런 이상을 꿈꾸며, 자연스레 투잡스족이 되고 있다.
주말이면 산에서 산악자전거를 타거나 농구 골대 밑에서 땀을 흘릴 때, 진정 행복하고 자기 자신을 충일하게 느낀다면 잘 생각해보라. 당신이 행복해하는 일, 즐기고 있는 취미 속에 또다른 돈벌이, 또다른 인생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Economy21 81호]